정리 노트

중국의 문화 유산

멋진 하루 인생 2015. 6. 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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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商)시대 문화재 



원래 상나라는 산동성 곡부에 도읍을 정했으나 상나라의 20대 왕인 반경이 은허(지금의 중국 허난성의 안양 현)로 도읍을 옮기면서 상나라를 은나라라고도 하였다.

은허(殷墟)(기원전 1600년 ~ 1046년)는 중국 허난성(河南省)의 안양현(安陽縣) 북서 일대에 있는 상나라 시대의 유적이며, 그 유적을 남긴 고대 도시의 이름으로서 상나라 후기의 수도로 여겨진다. 1899년 이 곳에서 갑골문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중앙 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는 1928년부터 1937년까지 15회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다량의 갑골문, 10여 좌(座)의 큰 묘, 1000좌에 달하는 작은 묘, 은(상)나라의 궁전 및 주거지가 발견되어 이 땅이 반경(盤庚)이후의 은나라 수도였음이 확인되었다.)



1. 중국 최초의 도성: 은허궁전종묘유지 - 인쉬궁디안취(殷墟宫殿区, 은허궁전구역)



은허궁전종묘유지는 국내외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세계 문명국 중 가장 유명한 '고전성방'중의 하나이다. 50여 채의 건축유적은 궁전, 종묘, 제단으로 나누었는데 규모가 아주 웅대하다. 궁전 유적에서 수많은 갑골문, 청동기, 옥기, 보석기 등 진귀한 문물이 출토되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16만 건이라 한다. 또한 이 은허 문물에서는 은나라 선민(先民)들의 지혜와 솜씨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은허가 도시·문자·청동기'등 인류 문명사의 세 가지 요소 갖추어져있는 찬란한 중화문명이라고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평가했다. 은나라는 노예사회 중에서 가장 진화된 사회였고 도읍, 문자와 청동기는 은문화의 대표적인 상징이 된다."



2. 중국 최초의 문자 -인쉬쟈구원(殷墟甲骨文, 은허갑골문자) 


갑골문은 거북 배딱지와 소의 어깻죽지 뼈에 새긴 글자이다. 그래서 거북 배딱지를 나타내는 갑(甲)과 소뼈의 골(骨)을 합쳐 갑골문이라 한다. 여기에 새긴 글은 복사(卜辭), 즉 점을 친 후 그 결과를 적은 것이었다. 은나라의 점복(점치는) 문자로 사용된 갑골문자(甲骨文字)는 현재까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자이다. 갑골문자는 1899년 은나라의 옛 왕도 자리인 은허(殷墟)에서 발견되었다. 

귀갑이나 짐승의 뼈를 사용한 복점은 신석기시대부터 행해졌지만, 여기에 문자를 새긴 것은 오직 은나라시대만의 특색이다. 현재 알 수 있는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회화적 요소를 다분히 남기고 있으나, 순수한 그림문자보다는 상당히 진보되어 있다.

문자의 수는 대략 3,000자, 그 중 해독된 것은 약 절반이다. 그 후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반경(盤庚) 때부터 은말(殷末)까지 약 2백 수십 년에 걸친 것으로, 보통 이것을 5기(期)로 나누어 연구하고 있다. 내용은 제사(祭祀), 군사(軍事), 천상(天象), 전렵(田獵), 농경(農耕), 임금의 행행(行幸)과 안부(安否)에 관한 것이 많고, 이것으로 은대의 정치, 사회, 경제 등이 밝혀져서 전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던 은 왕조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임이 실증되었다.



3. 중국 최초의 차마 유적 -인쉬처마컹(殷墟车马坑, 은허차마갱)


차마갱이란 ‘전차와 말을 매장한 구덩이’이란 말로 당시 은 왕이 탔던 축력차(畜力車·가축의 노동력을 이용한 교통수단)와 말과 사람이 함께 발굴되었는데, 한 사람이 두 마리의 말을 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문헌을 보면 하나라(BC2146-BC1675)부터 이미 마차가 발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은허에서 출토됐던 은나라 차마갱이 지금까지 고고발견 중 최초의 축력차 실물표본으로 공인되었다. 이는 중국에서 현재 발굴된 마차 중에 가장 역사가 긴 것이다. 은나라 시대의 사용했던 마차를 연구해 보면 구조가 정형화 되어있으면서 차체가 가볍고 정교할 뿐만 아니라 중심이 평형을 이뤄 운전이 용이했다고 한다. 현장에서는 차마갱 6좌(座)가 발굴되었는데 한 좌마다 수레 한대, 말 두필, 사람 한명이 함께 순장(殉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한 집단의 지배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뒤를 따라 강제로 혹은 자진하여 산 사람을 함께 묻었다. 은나라 차마갱은 상고(上古)시대 축력차의 문명정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노예사회의 순장제도도 성행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4. 중국 최대의 청동기 - 쓰무우딩(司母戊鼎, 사모무청동정) 

                   

사모무 청동정은 사모무(司母戊) 어머니 무에게 제사지냄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어서 이름이 붙여졌다. 상나라 28대 왕 문정이 아버지 무을의 왕비이자 어머니 무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동정은 높이133cm, 정구(鼎口) 넓이는 79.2cm,무게는 875kg으로 사모무청동정(司母戊鼎)은 현재까지 발굴된 가장 큰 청동기이다. 사모무정의 원본은 현재 중국역사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으며, 은허에서는 원본을 확대한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조형은 웅장하고 힘차며 무늬장식은 아주 정미하고 섬세하다. 사모무 동정은 세계 청동기 문화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이고 미술사상의 명주로 평가되어진다.


5. 중국 최초 여장군의 무덤- 부호묘(婦好墓)


부호(婦好)는 상나라 임금 무정(武丁)의 비(妃)로 전쟁터에 나갔던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장군이다. 부호묘의 발굴은 1928년 이후 은허 궁전종묘유지에서 제일 중요한 고고발견으로 공인됐고 그해 전국 10대 고고발견에 들었다. 부호묘는 은허에서 유일한 완벽하게 보존된 상나라 왕실성원의 고분이다. 무덤은 동서로 4m, 남북으로 5.6m, 깊이 7.5m이고, 묘 위에는 모신종(母辛宗)이라는 향당(享堂)이 있다. 무덤에서 발굴된 정교한 수장품은 1,928개나 되는데 그 가운데에 청동기 468개, 옥기 755개, 골기 564개이고 다른 것들은 병기·연장·악기이다. 또 화폐 6,800여 개, 순장 유골 16구가 발견되었다. 이들의 정교한 순장품은 양도 많고 종류도 풍부하며 양식도 신기로운데 상나라 시대 아주 높은 수공업생산수준을 충분히 나타내서 진귀한 중국 국가급 국보라고 할 수 있다.


 



주(周)시대 문화재 



주(周,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나라는 상나라를 이어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유지된 나라로 이 시기에는 철기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서쪽의 웨이허 강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지배했다. 최근의 조사에서는 주나라의 청동기문화권이 중원에서 더욱 남쪽 지방인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등의 양쯔강 유역에까지 미친 것이 확실해졌다. 이후에는 기원전 771년 유왕이 살해되고 제후에 의해 옹립된 평왕이 호경(鎬京, 현재의 시안 시 부근)에서 부도(副都) 낙읍(洛邑, 현재의 뤄양 시)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 이후를 동주(기원전 770년~ 기원전 256년)로 구분한다. 


주나라 시대의 청동기는 거의 모두가 제사용이며 실용적인 것은 적다. 또 지금까지의 절대적인 조상 숭배가 약해진 것도 상과 주의 차이로서 들 수 있다. 상나라에서는 조상에 대한 숭배와 외경심이 매우 강하고 제사를 게을리 하면 당장이라도 탈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주나라 사람들도 조상에 대한 제사는 하고 있었지만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닌 순수하게 경의를 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상 시대에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점을 쳤지만 주대에는 그러한 일이 적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상이 남긴 금문에 비해, 주가 남긴 금문의 수가 적어 주대 전기보다 오히려 상대의 자료가 많은 상태이다. 




1. 금문 


금문은 청동기에 주조되거나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초기의 청동기에는 간단한 그림이나 기호만 새겨져 있었다. 뒤에 서주(西周) 시대로 접어들면서 청동기에 문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금문의 주된 사용 시기는 서주시대이므로 일반적으로 서주금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나라 청동기에도 족휘(族徽, 부족을 상징하는 문양)를 비롯한 문자가 주조되어 있는데, 오히려 갑골문보다 상형성이 더 농후하다. 또 서주이후에 춘추전국시대의 청동기에도 많은 금문이 주조되거나 새겨져 있다. 그러나 자체 상으로 금문은 일반적으로 서주의 금문을 말한다. 금문은 주로 청동기물에 주조되어 있기 때문에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하고, 이기명문(彛器銘文)이라고도 하며, 당시에 청동을 길금이라 하였기 때문에 길금문자(吉金文字)라고도 한다. 금문은 갑골문과는 달리 고대부터 세상에 전해져 내려온 것이어서 이에 대한 연구도 일찍부터 진행되었다. 금문은 정벌(征伐)·책명(冊命)·상사(賞賜)·사전(祀典)·계약(契約) 등 당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내용을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다.



2. 세 발 달린 솥, 정(鼎)


은(殷) 왕조에 이어 등장한 주(周) 왕실은 이른바 당시 천자(天子)가 존재하는 중원 지역의 중심이었고 그 상징물은 육중한 무게의 이 세 발 솥 (정(鼎))이었다. 정(鼎)은 신석기 시대(BC 3000경~1500경)에 처음 만들어진 중국의 용기로 원래 취사용 그릇이었다. 운두가 높으며, 일반적으로 가장자리에 손잡이가 달려 있고 기둥 모양의 다리 3개가 받치고 있다. 처음에는 흙을 구워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으로 만들었고, 주로 고대 종교 의례나 국가의 큰 잔치 때 사용되었던 예식용 그릇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청동정(鼎)은 중국의 상주(商周) 이래로 사용된 신성한 예기(禮器)의 하나로서, 신분을 나타내고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고대인들에겐 사당에 비치된 솥을 빼앗긴다는 것은 나라를 빼앗긴다는 의미가 되었다. 솥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종묘를, 국도를 세운다'는 뜻이 되어 '나라를 건설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주대(周代)에는 신분에 따라 정의 사용개수에 엄격한 차등이 있었다. <예기>에는 '사(士)는 1 혹은 3정. 대부(大夫)는 5정, 종(卿)은 7정. 제후(諸候) 및 천자(天子)는 9정을 쓴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분에 따라 크기와 형태에서 차이가 있고, 대체로 중앙에서 배급하여 사용되었다.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구정(九鼎)은 왕권과 중국의 아홉 개의 주(또는 부족)를 상징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이었다. 춘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엄격한 용정제도(用鼎制度)는 파괴되었으나 그 상징적 의미는 여전하였다. 청동 예기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청동 솥 즉, 정(鼎)은 상주(商周)시대에 통용된 천하 통일의 상징이었으며, 천·지·인을 연결하는 신비의 보기(寶器)였다. 은(상), 서주에서 춘추전국시대에 각 제후국들은 제후가 거주하는 내성 안 중심부에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그 안에 국가의 조명(祖命)과 국통(國統)을 상징하는 정(鼎)을 안치해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을 표현하였다.




*도철문 문양 


은나라 때와 주나라 때의 청동기 정에는 보통 도철문(饕餮文) 등 세세한 장식이 새겨져 있는데, 도철문 문양은  중국 고대 문양으로 은殷에서 서주西周 중기에 종교의식에 사용한 청동기에 가장 빈번하게 보이는 수면문(獸面文)의 일종이다. 정면향의 짐승 얼굴을 중심으로 몸체가 양쪽에 대칭적으로 배치되거나 생략되기도 한다. 부릅뜬 눈과 눈썹, 위로 말린 큰 뿔, 송곳니 등이 뇌문(雷文)을 바탕으로 양식화된 형상을 하고 있다. 청동기에서 표현된 도철문은 초기에는 얕은 양각선으로 표현되었으나 은대(殷代) 중, 후기가 되면 뇌문의 바탕 위로 모티브가 돌출한 부조풍으로 묘사된다.

‘도철(饕餮)’이란 단어는 《좌전左傳》과 《여씨춘추呂氏春秋》 《신이경神異經》 《산해경山海經》 등에 탐욕스럽고 흉악한 부락 또는 동물을 지칭한 것인데,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선식람先識覽>에 따르면 정(鼎)에 새겨진 도철은 자신의 몸까지 먹어버린 모습을 통해 지나친 탐욕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도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추정되는데 토템신앙의 대상이었다거나 신과 교통하기 위한 신수(神獸), 호신용 부적 또는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추상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3. 작(爵) 


주나라의 제례 용 술잔이 작(爵)이다. 주나라는 청동기가 은나라를 이어서 예술성을 띨 정도로 수려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컵 모양으로 된 몸체의 아가리 한쪽은 따르는 주둥이이고, 다른 한쪽은 뾰족한 꼬리 모양인데, 중앙에는 두 기둥이 있고, 몸체 한쪽에는 손잡이가, 아래쪽에는 가늘고 긴 삼각(三脚)이 받치고 있다. 모양으로 보아 술을 데우는 데 알맞을 듯하나 술잔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모양이 참새와 비슷하다고 하여 작(雀)과 발음이 같은 '작(爵)'으로 명명되었다. 밑이 편평한 것에서 달걀 모양으로 정형화(定型化)된 시기는 은나라 말기·주나라 초기로 이때 가장 성행하였다. 그러나 서주(西周) 중기에는 쇠퇴하여 동주(東周)시대에는 이미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종묘제사 때 이를 바치기도 하고 때때로 은상(恩賞)으로 신하에게 하사하였다고 한다.





진(秦)시대 문화재



1. 만리장성(萬里長城)


진나라의 문화재에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만리장성이 있다. 만리장성이 지어지게 된 이유는 북쪽의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시황제가 증축하면서 쌓은 것이며 명나라 때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는 이 문화유산은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벽이다. 하지만 흙으로 지은 까닭에 시간이 지나며 방어 기능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만리장성의 중심인 바다링은 종합적인 군사시설로 황제가 사는 베이징을 통하는 주요 길목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곳 보다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세계에서 가장 장대한 규모의 군사 시설물이 된 만리장성은 역사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벽인 동시에 건축학적으로도 탁월한 유적이다. 이러한 만리장성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다.



2. 진시황릉(秦始皇陵)


다음 문화재 진시황릉은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나라 시황제는 세상 떠나기 전까지 엄청난 토목 건설을 펼쳤는데 만리장성, 아방궁 그리고 불로장생을 꿈꾸며 거대한 무덤을 건설한 이 진시황릉이다. 진시황제의 무덤 유적지는 산시 성의 고도 시안 동북쪽에 있으며 진시황제가 잠들어있는 거대한 무덤은 발굴을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 진시황제는 시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7km 지점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힐 안식처를 짓기 시작하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7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10년 넘게 공사했다고 한다. 진시황릉은 보기엔 인공으로 만든 묘지라는 느낌보다는 산 같이 보이며 현존하는 단일 무덤 가운데 가장 크다. 



3. 병마용갱(兵馬俑坑)


그 다음 문화재로 병마용갱이 있다. 1974년에 우물을 파기위해 땅을 파던 농부에게서 발견된 이것은 발굴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진시황릉에 딸린 병마용갱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세계의 8대 경이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병마용들은 진시황 친위군단의 강력한 위용을 과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진나라의 군사편제, 갑옷, 무기 등의 연구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와 아울러 일부 도용에서 확인되는 북방 민족의 두발형식은 친위군단의 민족적 구성을 짐작하게 한다.






4. 아방궁(阿房宮)


다음 문화재인 아방궁은 진시황이 기원전 212년에 건립하기 시작한 대규모 황궁으로 아방이라는 이름은 수도 셴양(지금의 셴양시 동쪽)에서 가까운 궁전에서 유래했다는 설, 사방이 넓은 궁전이라는 뜻으로 유래했다는 설 등이있다. 아방궁의 규모는 위에는 1만명이 앉을 수 있으며 아래는 약 2.5m의 기를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완성되기 전에 진왕조가 멸망하면서 초패왕 항우의 군대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흙으로 쌓은 궁전 기초부분과 전궁의 흔적뿐이라고 한다.



한(漢)시대 문화재



1. 사기(史記)


동양뿐 아니라 세계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사기는 사마천이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에 따라 완성한 역사서로 황제시대부터 자신이 살았던 한 무제 때까지 2000여년을 다루어다. 역사 속에 명멸해 간 제왕과 제후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과 각국의 생존사가 사기에 생생하게 담겨있다. 춘추전국시대를 정점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온 상고시대는 역사상 가장 치열한 생존싸움이 서려 있었고, 그 아래에서 펼쳐진 개개인들의 힘겨운 삶은 사기 곳곳에 각인되어 있다. 여기서 ‘사기’는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사관의 기록’이라는 의미와 한대의 문장학(文章學)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일컫는 사기라는 명칭은 사마천이 붙인 것이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조정의 명을 받아 집필한 관찬 역사서가 아닌 사마천 스스로 발분하여 집필한 사찬으로 이 점은 조정의 간섭에서 벗어나 사마천의 개인적 사관이 좀 더 직접적으로 책에 녹아들 수 있게 했고 당대의 제왕이었던 한 무제에 대한 날 선 비판을 가능케 했다.




* 명기


명기는 무덤 속에 사자와 함께 넣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채색도자기인데, 사람의 형태를 취한 것을 용(俑)이라고 한다. 용 이외에도 조수를 비롯하여 말이나 소를 나타낸 것에 걸작이 있으며, 사자가 생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주택건축이나, 양, 멧돼지 등의 명기도 있다. 이들 명기는 조각으로서 보더라도 조형성이 뛰어난 것이며, 소박한 가운데서도 한대 장인의 생명과 역량을 잘 나타내고, 또 당시의 생활습속을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위진 남북조(魏晉 南北朝)시대의 문화재



조조의 위(魏), 유비의 촉(蜀), 손권의 오(吳)로 분열된 시기가 삼국시대(220~280), 위의 촉 병합 후 진(晋)이 중국을 통일(280)하고 다시 내분 끝에 흉노에 멸망하여 5호(흉노ㆍ선비ㆍ갈ㆍ저ㆍ강)의 16국이 흥망(316~439)한 시기가 5호 16국시대, 그 후 진의 일족이 난징에 동진(東晉)을 세워(317) 남조(南朝)를 이루고 5호 16국이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에 의해 수습되어 북조(北朝)를 이룬 시기가 남북조시대(439~589)다. 위진남북조시대는 발달한 화북의 중국 문화가 강남으로 이동하고 강남이 경제 중심지가 되는 등 중국 역사상 중요한 전환기가 되었다.



1. 루산 국립공원(廬山 國立公園)


루산 국립공원은 빼어난 미적 가치를 가진 문화경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중국인의 정신적·문화적 삶과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자연환경의 관점에서 루산은 지난 2,000년 동안 정신적 지도자, 학자, 화가, 작가들이 매력을 느끼며 관심을 가졌던 지역이다. 루산은 뛰어난 몇몇 중국 고시(古詩)에도 영감을 주었다. 루산의 풍경은 철학과 예술에 영감을 주었고, 수준 높은 문화유산은 금세기까지 섬세하게 완성되어 왔다.


루산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은 신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루산의 중요성은 기원전 3세기 후반에 시작된 한(漢)나라에서 비롯되었다. 한 왕조와 그 이후에 생긴 왕조의 황제들이 이곳에 오랫동안 기념비적 건물을 세우면서, 루산은 점차 학문과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명승 혜원(慧遠, 334~416)은 동림사(東林寺)에서 불교의 한 종파인 정토종(淨土宗)을 창시했으며, 당나라 승려 감진(鑑眞)은 750년경에 일본으로 불교를 전파했다


루산 국립공원에 있는 문화적 유산은 네 그룹(고고학적 기념물들, 비문들, 역사적 건물들, 중국인과 외국인의 산장)으로 나눌 수 있다. 고고학적 기념물들은 팅쯔둔(Tingzi Dun, BC 4000)에 있는 거대한 신석기 거주지와 하(夏)·상(商)·주(周) 시대(BC 1600~1000)의 농경·수렵·어업 거주지, 전 생애에 걸쳐서 수시로 루산을 찾았던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거처, 포양호(鄱陽湖)의 전쟁터(삼국시대, 220∼265)이다. 루산 국립공원은 하, 상, 주부터 시작하여 현대까지 그 시대의 특성에 맞게 변화한 문화재로 빼서는 안될 중국의 유산이다.



2. 둔황 모가오 굴(莫高窟)



실크로드의 전략적 지점에 위치한 모가오 굴 492개 동굴과 석굴 사원은 불교 미술의 1,000년 역사를 보여 주는 입상과 벽화로 유명하다. 모가오 굴은 북위(北魏, 386~534)에서부터 원(元, 1276~1368)의 몽골 왕조에 이르는 1,000년 동안 중 와국,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예술적인 교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가오 굴의 벽화는 수(隋)·당(唐)·송(宋)나라에 이르는 고대 중국 문명의 이례적인 증거를 보유하고 있다. 492개의 굴 가운데 가장 오래된 302굴은 수레를 끄는 낙타를 묘사하는 벽화 등 실크로드 예술의 주제가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61굴 안의 우타이산(五臺山) 축제 모습은 지역 기병들의 위치를 보여 주는 지도 제작 간행본의 예로서 산· 강·도시·사원·도로·대상 등 모든 것이 빠짐없이 묘사되어 있다. 


천불상 동굴은 불교 석굴 사원의 탁월한 예이다. 수세기 동안 실크로드의 두 갈래가 만나는 지점 근처에 있는 둔황 오아시스는 중계무역 지점으로서의 특권을 누렸다. 모가오 동굴은 동서 문물 교류의 역사 뿐 아니라 불교의 아시아 전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곳에서는 한자·티베트어·산스크리트어·고대 터키어·위구르어와 심지어 히브리어로도 쓰인 필사본도 나왔다. 모가오의 동굴군에는 5층으로 세워진 암자와 사원으로 구성된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는 암벽에 새긴 뒤 진흙으로 덮고 채색한 2,000점 이상의 조각, 그리고 약 45,000㎢의 벽화 등 독특한 예술적 성취를 볼 수 있다. 특히 벽화 중 다수는 중국 미술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간쑤성 북서쪽 끝의 사막 지대에 모가오의 절벽이 있으며, 이는 밍사산의 동쪽 모서리가 된다. 이들 절벽은 둔황 오아시스로부터 남동쪽으로 25㎞ 떨어진 다촨허(大泉河) 위로 우뚝 솟아 있다. 절벽 안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492개의 작은 굴과 바위로 만들어진 성역이 1,600m 이상 계속되면서 유명한 천불동(千佛洞, 1,000부처의 동굴)을 이룬다. 이들 동굴의 역사는 중국 원정대가 몽골 초원 및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과 싸운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중국의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모가오 굴은 동서 문물 교류의 역사 뿐 아니라 불교의 아시아 전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동굴 속에 입상과 벽화는 불교 미술의 1,000년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이 굴은 19세기 말부터 1930년대까지 여전히 불교 승려들이 사용한 장소였다. 모가오의 바위 예술은 둔황 문화유물협회에서 관리하면서 전통적인 수도원 정착지의 예로서 잘 보존하고 있다.



3. 운강 석굴(雲岡 石窟)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서쪽 15km, 우저우강[武州江] 북안에 있는 사암(砂岩)의 낭떠러지에 조영된 석굴로 북위시대 때 만들어 졌다. 전체길이는 동서로 약 1km에 이르며 석굴의 총수는 42개이다. 동쪽 언덕에 제1∼4동(洞), 중앙 언덕에 제5∼13동, 서쪽 언덕에 제14∼42동이 있다. 북위(北魏)의 역사서 《위서(魏書)》의 〈석로지(釋老志)〉에 따르면, 사문통(沙門統:종교장관) 담요(曇曜)가 당시 문성제(文成帝)에게 석굴 조영을 주청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담요 오굴(五窟)'이라고 불리는 제16동에서 제20동까지가 이때에 만들어진 석굴로, 460년대 초에 조영된 것이다.


윈강석굴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의 양식은, 제20동의 노좌대불(露座大佛:높이 14m), 제19동의 대불(높이 약 17m)을 중심으로 하는 조상(彫像)에 초기 양식이 표현되어 있는데, 치졸하지만 소박한 면과 선으로 구성된 서방 양식이 풍부한 작풍이다. 담요 이후는 전통과 외래 양식이 혼합되면서 다양해졌다. 이 석굴의 융성기는 486년 전후였는데, 이 무렵의 불상은 중국 고대의 복제(服制)를 모방하였다. 신체보다도 복제 표현에 유의하여 조각하였고, 얼굴은 길며 매우 신비롭다. 북위불(北魏佛) 또는 육조불(六朝佛)이라 하여 후에 하나의 조상 기준이 된 것도 이 무렵의 불상이다. 이 석굴은 북위의 문화사적 유산일 뿐만 아니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서북 인도·중앙아시아와의 문화적 교류 및 한국과 일본의 고대문화를 만들어낸 아시아 문화 생성의 자취를 입증해 주는 중요한 유구(遺構)라고 할 수 있다.


4. 룽먼 석굴(龍門 石窟)


룽먼석굴은 뤄양 교외를 흐르는 이허(伊河)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룽먼산(龍門山)과 샹산(香山)의 암벽을 따라 약 1.5km의 구간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때인 5세기 말부터 당나라 때인 9세기까지 2,300여 개의 석굴과 벽감(壁龕)이 조성되었다. 이 중 북위 때 조성된 석굴이 30%, 당대 석굴이 60% 기타 왕조의 석굴이 10% 정도이다. 다퉁(大同)의 윈강석굴(雲崗石窟)과 둔황 막고굴(敦煌 莫高窟)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히는 이곳은 특히 예술성이 높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200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암벽을 따라 벌집처럼 늘어선 크고 작은 굴 안에 불상이나 불탑이 모셔져 있는데, 불상은 10여미터가 넘는 것부터 수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것까지 다양하다. 10만여점이 넘는 불상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표정에 뛰어난 솜씨와 멋을 자랑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방치되면서 훼손된 부분이 많다. 불상머리를 소장하면 복이 온다는 미신 때문에 머리가 떨어져나간 불상이 특히 많고, 이외에도 도굴단에 의한 불법반출,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한 파손 흔적도 뚜렷하다. 대표적인 불상으로, 펑셴쓰[奉先寺]의 대형 비로자나불, 루서나대불이 있다. 폭 35m 석굴 안에 있는 대불은 전체높이가 17.4m에 이르며, 머리 길이가 4m, 귀 길이가 1.9m나 된다. 수려한 용모에 인자한 웃음이 인상적인데, 막대한 건축자금을 대면서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隋)시대 문화재



한나라 멸망 후 삼국시대와 위진남북조시대 400년간 중국대륙 민초들은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하루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삶은 연속이었다. 이렇게 세상이 혼란한 시기 민초들이 의지 할 수 있는 곳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신적인 안식처를 찾을 뿐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불교는 중국에 전파되어 일반백성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다. 혼란한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隋 581년~618년)왕조시대는 짧지만 불교가 체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기득권 세력을 견제해야 하는 새로운 왕조는 불교를 백성들이 마음을 통일하는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이를 지원하게 되었다. 수 문제 양견 (隋文帝 楊堅, 541년~604년)은 몸소 근검절약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잡고 불교지원과 더불어 중앙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과거제도 실시하는 등 통일대륙 안정화에 다양한 노력을 하여 치세동안 수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허베이성 정딩현 천년고찰 륭흥사(隆興寺-隆兴寺)


중국 10대 사찰 중 한 곳으로 이름이 높은 허베이성(河北省) 정딩현(正定县)에 있는 륭흥사(隆興寺-隆兴寺)도 바로 이시기 수나라 문제6년 586년 시대에 건설된 1400년이 넘는 고찰이다. 수나라 시기부터 용장사(龍藏寺)로 불리었으나 청나라 시기 강희45년(1706년) 륭흥사라는 편액을 하사 받으며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다. 지금의 건축물들은 송나라 시기 대대적인 중수를 거치며 전체면적이 85,200평방미터로 확장 건설되었으며 황실의 지원으로 당, 송, 원, 명, 청 여러 왕조 시대를 거친 고찰이나 원형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수나라 시기 사찰을 최초로 조성할 때 세운 용장사비(龍藏寺碑)에는 모두 30행, 매행50자 총 1,500자의 해서(楷書)체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자는 수나라 최고의 해서체로 이후 해서체의 시조로 여겨진다. 송나라시기 대대적인 증수로 청동관음상등이 추가 되며 대불사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현재 조벽(照壁), 천왕전(天王殿), 대각육사전(大覺六師殿), 터마니전(摩尼殿), 계단(戒壇), 자씨각(慈氏閣), 전륜장각(轉輪藏閣), 강건어비정(康乾御碑亭), 대비각(大悲閣), 어서루(御書樓), 집경각(集慶閣), 미타전(彌陀殿) 등을 비롯하여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아름다운 목조건축 10여 채가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방문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당(唐)시대 문화재



당(唐)은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統一帝國)으로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어, 당에서 발달한 문물(文物) 및 정비된 제도는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쳐 그 주변 민족이 정치, 문화적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 당삼채


중국 당대(618~906) 의 도기로 삼채 유약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주로 장안, 낙양 귀족들의 장례용으로 제작되었고, 묘릉에 부장되었다. 도질(陶質)의 소지에 화장한 다음 녹, 갈,  황, 백의 연유로 화려하게 칠하였으며, 또는 코발트의 남유(藍釉)를 칠한 것도 있다. 기형은 용수호, 만년호와 반(盤), 완(盌) 외에 여러 가지 형태의 남녀 인물상, 신상, 진묘수(鎭墓獸), 말, 낙타 등의 각종 명기가 있다. 당대 귀족의 취미, 생활양상을 잘 나타내고 또 당시 유행한 서아시아 풍의 의장과 복식이 가끔 보인다. 아마도 측천무후(재위 690~705) 경부터 출현하여 후장(厚葬)의 풍습이 높아짐에 따라 크게 유행하였으나, 안록산의 난(756) 이후에는 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발해삼채, 요삼채, 송삼채 등과 페르시아 삼채 등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고 한다.


2. 영태공주묘


중국 산시성 건현에 있는 당나라 때의 벽화 묘이다. 묘주 이선혜(李仙蕙 684~701)는 당나라 중종의 제7황녀로 부마도위 무연기(駙馬都尉 武延基)에게 출가하였으나 조모 측천무후에 의하여 대족원년(701) 17세 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무후가 사망한 신룡2년(706), 영태공주의 시호를 받아 건릉에 매장되었다. 묘는 직경 56m, 높이 20여m의 분구(墳丘)가 있고 앞에 석인, 석수, 화표(華表) 등이 놓였다. 묘 내에는, 천정 6개가 있는 묘도(墓道) 깊숙한 곳에 용도(用道)에 의해서 연락되는 전후2실의 전축묘실이 있다. 묘문의 돌 문짝과 후실 석곽에는 유려한 선각(線刻)에 의한 인물, 당초무늬 등이 있다. 벽화는 묘도의 좌우 벽에 청룡, 백호와 누각, 의장대가 그려져 있고, 용도에는 인물과 꽃, 운학이 있다. 특히 전실 동쪽 벽의 시녀군상이 잘 알려져 있고 여의, 불자, 촛대, 잔 등을 손에 든 9인의 시녀(한 시녀는 남장)들이 활달한 묵선과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같은 양식의 군상이 전실 서벽과 후실 네 벽에도 있으나 칠이 벗겨지고 떨어진 것이 많다. 천정에는 일월성신의 그림이 있다. 묘지석은 사방 1.2m인데 주위의 부조 문양이 훌륭하다. 황녀의 묘이기는 하나 특히 ‘능’으로 조영되어 그 아름다움은 당시부터 유명했고 벽면은 현존하는 당나라 회화의 대표적인 작품. 그 외에 삼채 인형, 금은 장식품, 도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3. 불광사


중국 산시성 오대현(五台縣) 두촌진(豆村鎭)의 북쪽 5km의 산허리에 위치했다. 절은 북위(北魏) 이래의 명찰이라고 한다. 대전(大殿)은 당대 후기(9세기 중엽)의 큰 목조건물의 유구로서 알려져 있으며, 모임지붕 식 지붕마루의 망새(치미, 鴟尾)는 요식(遼式)에 비슷한 어두형(魚頭形)이 붙어 있다. 내부에는 정면5간×측면3간의 주실이 있으며 금주(金主)가 늘어서 있고, 정면에는 당풍(層風)의 불 보살소상(塑像)이 배면에는 명청시대의 나한상(羅漢像) 다수가 있다. 두공에는 비앙(飛昻)이나 하앙(下昻)을 쓰고, 금주주두(金柱柱頭)는 투심두공에 의하는 등 화려하고 역학적인 당양식이 보인다. 대전 전방에 있었던 정면 7간, 3첨, 높이 95척의 미륵대각(彌勒大閣)이 회창(會昌)의 배불(排佛, 845)로 허물어지고, 847년~860년에 원성화상(愿誠和尙)이 재건한 것이 현존의 건물이다. 대전 앞에 선 대중 11년의 석당(石幢)명문에 재건의 사정이 적혀 있고 같은 재건공헌자의 이름이 대전의 대들보 묵서에도 있다. 대전 후방에는 742년~756년에 창건의 팔각전탑(塼塔)이 있었으나 대기(台基)만이 남아 있다. 




송(宋)시대 문화재



송(宋은) 960년 조광윤이 개국하였고, 재정을 중심으로 전제권을 강화한 나라다. 즉 중앙에서 경제를 지배해 전국을 운영하는 나라였다. 중앙 정부운영이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간 상업이 발달하는 것은 당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상업적으로 인기가 높던 수공업품 생산에서는 송 이전 어느 왕조보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관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수공업품들이 송시기에 들어 급속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생산품이 도자기였다. 송 시대에 들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정신적 유희를 즐기는 사대부 집단이 늘어나면서 도자기 예술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도시문화가 발달하면서 요식업, 특히 차 문화가 발달했고 이에 따라 그릇 소비도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여러 고객의 심미안과 수요를 자랑하던 청자뿐만 아니라 백자, 흑자 채색자기 등 도자기이 형과 색이 다채로워졌다. 이 시기에 이름난 도자기들을 5대 명요라 부르며, 이들은 각각 정요, 여요 ,관요, 가요, 균요 등이다. 



1. 5대 명요(名窯)


1). 관요(官窯)

송나라 5대 명요 중 하나로서 남요와 북요 이렇게 두가지로 나뉜다. 북송시기(1111~1125) 당시 관청에서는 도요지를 설립해 청자기를 제조했는데 이것을 북송관요라 한다. 그 뒤로 송의 정치중심지가 남방으로 이동되면서 관청에서는 항주에 도요지를 설립했는데 이것을 남송관요라 한다. 기물 모양이 우아한 궁전 풍격을 띠고 있는 관요는 청유자기 제조로 유명하다. 관요는 원료의 선택과 유약색의 조절에 신중하며 사용하는 자토(瓷土)는 철분함량이 매우 높아 태골(胎骨)색상은 보통 검은빛 자주색을 띤다. 송조관요 자기는 그 품질을 중시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유색미를 추구한다. 두꺼운 유약으로 된 자기는 거의 무늬를 가하지 않고 보통 유약색으로 장식을 살려준다. 


2). 여요(汝窯)

송조 5대 명요 중의 하나이다. 여요가 왕실의 임무를 접수해 여관요기를 제조하면서 북방 청자기의 기술은 전국 최고로 되었다. 여요는 주로 유약중 적당량의 철분에 의거해 순수한 청색을 띠고 있으며 유약면에 있는 갈라진 작고 가는 무늬는 여요의 화려한 장식으로 되었다. 여요는 남방 월요(越窯)의 유약색을 채용했고 동시에 정요의 날염기술을 흡수했으며 꽃무늬 청자기의 특수한 풍격을 창조했다. 여요는 또한 북송시기 관요(官窯), 즉 궁중에서 전문 사용하는 기물을 책임졌으므로 시장과 민간에서는 거의 전래되지 않았다. 여요의 제품에서 최고의 기물은 황실에 제공했고 불합격된 제품은 가끔씩 시장에서 판매할 수도 있었다. 


3). 가요(哥窯) 송조 5대 명요 중의 하나인 가요는 품질이 좋고 가공이 세밀해 전부 궁전용 자기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민간자기와 현저한 차이가 있다.


4). 정요(定窯) 정요는 당조말기 5대 시기에 시작되어 북송시기에 성행했으며 금, 원조시기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북송 정요는 주로 백자기 제조를 위주로 하며 날염, 새긴 무늬, 빚기 등 장식법을 사용한다. 무늬는 연꽃, 모란 등을 가장 흔히 보며 화면이 간결하고 생동한 것이 특징이다. 정요는 백자기 외에 흑자기, 녹색자기도 제조하며 모양은 반과 사발이 가장 많은 외 병, 베개, 함 등 모양도 적지 않다. 정요는 태벽이 얇고 가벼우며 유약색이 하얗다. 북송초기 정요제품의 아구리 부위에는 유약이 있었지만 북송말기에 이르러 아구리 부근에 유약을 하지 않았는데 이것을 "망구(芒口)"라 한다. 망구에 금, 은, 동 등 금속을 새겨 넣어 망구의 결함을 가렸는데 이것은 정요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송조의 자기 굽기 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는 바로 복소법(覆燒法) 즉, 거꾸로 놓고 굽기이다. 복소법 채용은 최대한 빈 공간을 이용해 연료를 절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물의 변형을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가를 낮추고 생산량을 대폭적으로 제고시켰다. 따라서 남북 자기 도요지에 지대한 영향을 일으켰으며 중국 자기제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균요(鈞窯)

균요는 철, 동이 내는 색상의 부동한 특징을 이용해 남색 바탕에 붉은색, 자주색 등 각종 유약을 내는 것이다. 균요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유약면에 불규칙적인 흐름상태의 가는 선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것을 “지렁이 무늬”라고도 부른다. 균요 자기는 중국 역사상의 보물로서 품종이 다양하고 모양이 독특하며 화려한 유약으로 유명하다. 송조 때 “황금은  유가: 금전상의 가치가있다.

유가(有價)이지만 균요는 무가(無價)이다." "백만 재산을 갖고 있기보다 균요 하나를 소유하는 것이 낫다"라는 설도 있었다. 



2. 철제범종(鐵製梵種)


중국 송나라에서 만들었지만 현재 우리나라 전등사에 있다. 이 종은 재질이 동종이 아니라 철재라는 점이 특이하다. 범종 몸체에 쓰여 있는 글을 통해 1097년 중국 허난성 백암산 숭명사에 처음 봉안되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로 건너온 연유는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 종으로는 인천광역시립박물관과 개성 연복사에 있는 종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전등사에 있는 송나라 범종은 특히 연복사 종과 매우 닮았다. 우리나라의 종과는 형태가 판이하여 꼭대기인 용두(龍頭)의 음관이 없고, 용 두 마리가 등을 마주해 꼭지를 이루고 있다. 용두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으며, 그 옆에는 9개의매화꽃무늬가 새겨져있다. 종신(鐘身) 윗부분에는 팔괘가 나열되어있고, 종신은 아래위 두 개의 가로띠로 상하2구(區)로 구획되어 있고, 그 위에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 4개가 배치되어있다. 이런 양식은 전형적인 중국 종의 특징이다. 중국 종이기는 하지만 보기 드문 철로 만든 종이고 역사가 오래되어 우리나라에서 인정받는 종이다.



3. 카이펑 철탑(鐵塔)


11세기에 지어진 철탑은 8각 13층으로 높이가 55.88m인데 표면에 유약을 바른 벽돌인 ‘유리전’을 썼기 때문에 철색으로 보인다. 탑의 테두리벽돌에는 도깨비 문양이나 보살상들이 새겨져있고 내부의 나선형 계단은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우리나라와 달리 중국은 주로 벽돌로 쌓은 전탑이며, 탑 내부가 비어있어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4.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현재 북경의 고궁박물관에 있다. 북송시대 장택단이 수도 개봉거리를 그린 것인데 길이가 무려 525cm에 달한다. 이 대형 그림은 운하 주변 풍경과 다리, 십자로 등에 늘어선 상점들,  송대어가: 송대거리를 재현해 놓은 거리. 중국 전통의 이층으로 돤 건물에 선물가게, 종이 우산가게, 자수 공예 등을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어 볼거리가 풍부하고 기념품도 살수있음



송대어가처럼 궁성에서 외성으로 이어지는 4개의 어가(御街) 앞에 각종 수공업 제품과 음식점, 술집, 차 마시는 곳 등은 물론이고, 노동자와 소시민의 삶을 자세히 표현하여 역사적가치가 더욱 높다. 장인들의 솜씨를 엿 볼 수 있는 홍교(虹橋)나 하토교(下土橋)까지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화려했던 당의 귀족 문화와 달리 서민적 성격이 강했던 송나라 문화 때문이다. 송나라는 남쪽으로 천도한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의 모사본은 보면서 두고 온 고국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5. 카이펑 번탑(繁塔)


원래 명칭은 싱츠사탑(興慈寺塔)이며, 카이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977년 북송(北宋) 태종(太宗) 때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9층이었으나 명(明)나라 때 황허의 범람으로 훼손되어 3층만 남았다. 나중에 남은  탑신: 탑기단(塔基壇)과 상륜(相輪) 사이의 탑의 몸

탑신(塔身) 위에 작은 탑을 얹어  탑찰: 탑의 제일 꼭대기

탑찰(塔刹)로 간주하였으며, 전체 높이는 31.67m이다. 탑의 각 층마다 탑신의 둘레가 급격히 줄어든다. 제1층 탑신은 다른 층의 탑신보다 높은 편이고 남쪽에 문이 있다. 제2층 탑신은 각 면마다 문이 있고, 제3층 탑신은 제1층 탑신과 구조가 같다. 제1층과 제2층은 모두 겹처마이고, 처마 밑에 목조건축을 모방한 벽돌로 만든  두공: 중국·한국·일본 등의 전통 목조 건축물에서 사용하는 특유한 지붕받침

두공(斗拱)이 새겨져 있다. 제3층 탑신의 외벽에는 이미지가 서로 다른 수십 종의 불상을 1만 존 정도 새겨놓아 '만불탑(萬佛塔)'이라고 부른다. 이 불상들은 자태(약 108개의 자세를 취하고 있음)가 다양하고 조각이 정교하여 송나라 조각예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탑 안에는 나무로 만든 마루 바닥과 계단이 설치되어 계단을 따라 올라가 멀리 조망할 수 있다. 탑 꼭대기에는 넓은 평대(平臺)를 만들어놓았다. 탑 1층 남문 안의 동쪽 벽에는《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金剛般若波羅密多心經)》이, 서쪽 벽에는《십선업도경요략(十善業道經要略)》이 새겨져 있다. 이 경문은 977년 조안인이라는 사람이 새긴 것으로 창건 연대를 알려준다. 제2층 남문 안의 벽에도 982년에 새긴《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元覺修多羅了義經)》등의 석각(石刻)이 있다. 탑 안에는 또 시주(施主)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159점의 석각이 있는데, 이러한 석각들은 중국 고대의 불교 경전과 서예를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원(元)시대 문화재 


원나라는 중국 역사상최초로 소수 민족이 통치한 통일국가이다. 서기 1206년 몽골족 수령인 칭기스칸은 몽골국을 건립했는데, 이때부터 황하 유역서 세력을 확장하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1271년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이라 칭하였으며, 8년 후에는 남송을 멸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수도를 대도(지금의 북경)로 정하였다. 



1. 칭기스칸 릉


칭기스칸 릉은 외몽골고원에 세운 대몽골국을 건립한 제1대 소수민족의 군주인 칭기스칸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지금의 내몽골 악이다사고원 이금곽락기 초원위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는 능침이 흰색의 거대한 8개 게르(파오라고도 하는 몽골족의 이동식 집)로 구성되어 ‘팔백실(八白室)’이라 불렀으며, 칭기즈칸 능침중의 게르를 민족 특색이 강한 능원 궁전으로 개축하였다. 궁전 꼭대기에는 몽골의 게르식 돔지붕이 나란히 서 있어 장관을 이룬다.



2. 광승사 잡극 벽화


광승사는 산서성 홍동현 고적중 하나로 명응 왕전 남쪽벽의 벽화이다. 각양각색으로 분장을 하고 극에 출연하는 모습인데 초기분장의 묘사 구도를 볼 수 있다, 또한 원나라 잡극과 사회 생활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 잡극: 송, 금 이래의 음악, 설창,무용등 각종 예술 형식이 융합하여 형성된 희곡예술

- 벽화의 정중앙에 복두를 쓰고 긴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홀판을 두고 있는 사람은 당시 유명했던 충도수 라는 배우이다.



3. 등봉 관성대


원조 13년때부터 원조16년(1276-1279)에 걸쳐 원대 천문학자 곽수경이 창건하였으며, 등봉시 동남쪽에서 15km 떨어진 주공묘 내에 있다. 등봉 관성대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천문대로 태양과 별에 비추어 생긴 그림자가 석규 위에서 길고 짧아지는 변화에 근거하여 춘 분,추분,동지,하지를 나눈다고 한다. 특히 하지 동지의 명확한 시간을 측정해낼 수 있고 정확 도는 지금의 일력과 똑같았지만 지금 일력 계산법보다300년 앞섰고, 현대의 과학 계산법과  26초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4. 묘응사 백탑


베이징 도심 서성구(西城區)에 위치하였으며 라마교를 신앙하던 원(元)나라가 도읍을 대도(大都), 오늘의 베이징에 정하고 네팔의 장인을 초청해 티베트 불교지역에서 전해진 라마탑을 베이징에 세웠다고 한다. T자형의 기단위에 높이 50.89cm로 전부 벽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밖에는 백화를 칠하였다. 묘응사는 4층으로 된 대궐과 가운데 백탑이 위치한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응사 백탑은 기단이 2층으로 된 모난 수미산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13 층으로 된 둥근 탑체가 얹혀 있다. 탑의 가장 위 쪽 우산모양의 상륜부까지 합치면 탑은 도합 50m높이에 달한다. 우산모양의 상륜부에는 36개의 구리풍경이 달려 있어서 바람이 불면 귀맛 좋은 소리를 낸다. 본체가 하얀색이고 탑 꼭대기는 노란색으로 조화를 이루며, 황금비례를 이루는 탑은 모양이 돈후하면서도 웅장한 기세를 자랑한다. 또한 조형의 비율은 모두 대칭이라고 한다.



5. 독산대옥해 凟山大玉海


독산대옥해는 1265년에 만들어진 원대 옥조각의 대표작이며, 북경 북해 단성에 위치하였다. 이것의 용도는 술을 담는 타원형의 커다란 술동이로 높이 70cm, 구경 1.5m 정도 무게는 3.5톤에 달한다고 한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크기가 가장 큰 옥그릇이고 몽골 귀족의 사치스런 모습과 호탕한 음주 풍조를 반영하였다.



명(明)시대 문화재



1. 북경 명13릉(明十三陵)


명13릉은 북경 창평구의 천수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명왕조(1368 ~ 1644) 13명 황제의 황릉이다. 이 명 13릉은 명의 번영을 알 수 있는 곳이라고 불린다. 명의 제 3대 황제인 영락제는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이전인 1409년에 삼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있고, 남쪽으로는 베이징을 향해 있는 텐서우산 남쪽 기슭의 땅을 눈여겨보았고 곧 자신의 능묘인 창링 건설에 착수하였으며, 1413년의 완성 이래 명의 17명의 황제 중 13명의 황제와 23명의 황후, 1명의 귀비가 잠들어 있는 능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북경에서 약 5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왕릉의 총 면적은 약 80제곱 킬로미터이다. 명13릉은 서기 1409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1644년에 명왕조가 멸망하기까지 200여 년 동안 13기의 황릉, 7기의 후궁묘, 그리고 1기의 태감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한 명13릉은 중국 역대 황제의 무덤 건축 중 비교적 온전히 보존된 곳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웅장한 건축, 완정한 체계, 유구한 역사로 비교적 높은 역사와 문물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현대로 와서 2003년 7월 3일에는 유엔세계문화유산위원회의 제27차 회의를 거쳐, 명 13릉은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되기도 하였으며, 현재 모든 릉을 견학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현재 공개되어 있는 곳은 지하궁전이 있는 만력제의 딩링과 영락제의 창링, 융경제의 자오링 3곳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황제의 비석 밑에는 거북이 상이 있는데, 머리를 만지면 만수무강을, 꼬리를 만지면 재물 운이 들게 된다고 한다. 또한 명13릉 내의 동서남북 네 방향에 있는 문을 지날 때 남자는 왼발로, 여자는 오른발로 넘으며, "나가겠습니다" 하고 외쳐서 알리지 않으면 나중에 무덤을 지키는 귀신이 찾아서 다시 끌고 온다고 한다.

 


*명13릉에 묻히지 못한 황제들

                                                                                

명나라에는 총 16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명십삽릉엔 13개의 능묘만이 존재하는 이유는 건국자인 태조 흥무제(주원장)의 무덤은 첫도읍지인 난징에 있고, 2대 견문제는 삼촌 영락제에 쫒겨난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 또한 몽골의 포로가 되어있던 6대 정통제 대신 7대 경태제가 황제에 즉위는 하였으나 거액의 배상금을 내고 풀려나온 정통제가 경태제를 죽이고 황제에 오르며 8대 천순제가 되었다고 한다. 즉, 6대 정통제와 8대 천순제는 동일 인물이다. 주원장의 장손자인 건문제는 왕위를 찬탈당해 능묘가 없으며, 대종 경태제도 폐위되어 정식 황제로 인정을 받지 못해 명13릉에 묻힐 수 없었다고 한다. 



2. 자금성 (紫禁城)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는 명(明)·청(淸)시대의 궁전으로 자금(紫禁)이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말로, 베이징의 내성(內城) 중앙에 위치한다. 1407년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하였다. 그 후 명·청 시대를 통하여 궁전과 궁문을 여러 차례 보수·개축하였으며 명칭도 바뀌었다. 성벽 주위 4곳에 각각 1개씩의 궁문이 있는데, 남쪽의 오문(午門)이 정문으로서 웅대하며, 동쪽을 동화문(東華門), 서쪽을 서화문(西華門), 북쪽은 신무문(神武門)이라 부르며 네 모퉁이에 각루(角樓)가 서있다. 성내는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으며, 남쪽은 공적(公的)인 장소의 바깥부분으로 오문에서부터 북쪽으로 태화문(太和門),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文華殿), 무영전(武英殿) 등의 전각(殿閣)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 태화전은 남북 약 33m, 동서 60m의 당당한 건물로서 자금성의 정전(正殿)이며, 중요한 의식장으로 사용되었다. 바깥부분, 즉 외조(外朝)의 북쪽은 황제의 사적인 생활을 위한 내정(內廷)으로서 보화전 북쪽에 있는 건청문(乾淸門)으로부터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 등이 한 줄로 늘어서 있으며, 그 좌경(左京)에 많은 건물이 있다고 한다. 내정은 1925년 이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으로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중국 문화재의 전당이 되고 있다. 


또한 명나라 세 번째 황제인 영락제가 10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 14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완성 한 곳으로, 벽돌 1억 개와 기와 2억 개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자금성은 황제와 그 일가를 위해서 9000명의 시녀와 1000명의 내시가 함께 거주했던 중국대표문화재이다. 자금성은 15만 ㎡의 엄청난 부지에 9000개의 방을 가진 궁궐과 누각이 있고 그 안에 중국 문명의 찬란한 보물을 가득 담고 있다. 자금성에는 내정(內廷)에만 나무가 심어져 있다고 하는데 내정은 황제가 황후나 후궁들과 지내던 곳이기 때문에 나무가 있고, 다른 곳에 나무가 없는 것은 자객이 숨을 장소를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금성 내의 자연 그대로의 수석을 비치한 것이 있는데, 수석의 왼쪽 면에 신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다하여 섬기는 듯한 보이는 문양이 있었기에 황제들이 이를 좋게 여겨 장식해 놓았다고 한다. 



자금성 보화전(保和殿) 대석조(大石雕)


자금성 보화전의 대석조는 청나라 건륭황제 26년인 1761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대석조는 아홉마리 용이 꿈틀거리는 초대형 석조 조각이며 길이는 16.57미터이고 무게는 무려 250톤에 달한다. 보화전은 자금성 외전의 마지막에 위치하며 최고 시험인 전시(殿試)를 치르던 곳이라고 한다. 



태화전(太和殿)


자금성 외조에 있는 태화전은 금란전이라 부르기도 하며 정교한 문양의 3층 한백옥 석대위에 축조 되었다. 8m나 되는 3층 대리석 기단 위에 세워진 35m, 폭 66m의 중국 최대 목조건축물로 두께 1.6m나 되는 동북지방 소나무 기둥 72개가 장관을 이룬다. 태화전은 황제 즉위식, 신년축하 의식 등을 시행하던 곳으로 궁전중앙에는 황제의 옥좌가 있다. 태화전 내부의 벽, 기둥, 서까래 등 모든 장식에 용이 사용 되었는데 무려 12,654마리의 용들이 그져 있다.


중화전(中和殿)

 

황금색 유리기와로 된 가로 세로의 길이가 각각 16m에 이르는 정방형의 아름답고 아담한 궁전이다. 중화전은 외조에 있는 3개의 건물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다. 1420년 명대 영락제때 최초로 건립된 후 몇 차례 화제로 전소된 이후에 현재 건물은 1645년 청대 순치제때 재건이 되었다고 한다. 명대에는 황제가 국가의 주요 의식직전 이곳에 머물며 준비하거나 조서 작성 등에 사용 되었다. 청대에는 서태후에 의해 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가 이화원 옥란당과 함께 유폐 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건청문(乾淸門)

 

건청문 앞에는 양쪽에 사자 두 마리를 문지기 상징물로 새워 놓았다. 암사자와 숫사자인 청동 사자 상 두 마리 중 암컷의 발밑을 보면 새끼사자가 뒹구는 모습이 있는데 이는 다산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건청궁은 황제가 거주했던 궁이며, 1420년 건축 후 소실되어 1798년 재건축 되었다. 청조의 웅정제부터는 황제가 대신들을 만나고, 황제의 일상업무를 보는 장소가 되었다. 


교태전(交泰殿)

 

교태전은 황후의 의식을 거해했던 곳으로 황후 생일, 새해 첫날, 동짓날 등의 축하인사를이곳에서 받았다고 한다. 황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옥새를 황후에게 맡기는데, 황후는 옥새를 이 교태전에 보관했다고 한다. 교태전 내부에는 보좌가 설치되어 있고 1798년 청대 가경제 3년 공중에서 제작 되었던 젠마이식 시계 자명종이 보존 전시 되어 있는데 지금도 태엽을 감아주면 대형시계는 작동한다고 한다. 


 

곤녕궁(坤寧宮)

 

곤녕궁은 교태전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황후가 거주했던 궁이다. 청조의 역대 황제가 결혼식을 올리고, 황제 신혼을 보냈던 궁으로 마지막 황제 푸이는 청조 멸망(1911년)후인 1922년 여기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곤녕궁은 자금성의 여느 궁전과 달리 만주족 고유의 건축 양식인 동쪽에 입구를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청(淸)대 문화재



1. 이화원(頤和園)


이화원은 원래 공원이 아니었고, 1750년에 청나라 건륭제가 보수하여 황실의 여름 별궁으로 쓰였다. 하지만, 1924년에 이화원은 공원이 되었고, 특히 청나라의 대표적 보수파 인물이자 여왕이었던 서태후가 1889년부터 죽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특히 덕화원, 동궁문, 청연방 등 수많은 건축물들이 있다. 또한 728m의 길이를 자랑하는 산책로인 장랑은 중국의 고전 문학에 나오는 1만 4천가지의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또한 호숫가에 있는 석방은 나무로 된 누각으로, 양쪽에는 모조 바퀴까지 달려 있어 흡사 외륜선과 비슷한 모습을 연출한다. 게다가, 이화원이 위치해 있는 쿤밍 호수는 사실 인공 호수로 인공 호수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하지만 이화원은 서양 열강의 침략을 받은 1860년에 처음 소실되었으나 금방 복구가 되었고, 또 1900년에 다시 소실되었으나 그때마다 복구가 되었다.


2. 천단공원(天壇公園)


천단공원은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에 풍년을 빌기 위한 제사를 드렸던 곳이다. 베이징 외성의 남동쪽에 있는 천단공원은 명나라 영락제의 통치시기에 건설되었지만, 청나라 건륭제의 통치시기에 확장되어 대향전이 기년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6km의 성벽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고 기년전, 황궁우 등의 건물들이 있지만, 기년전은 청나라 광서제 때 소실되어 1890년에 재건하여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3. 원명원(圓明園)


원명원은 이화원 옆에 위치한 왕실 정원이다. 원명원은 세 개의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명원(圆明园), 장춘원(長春園) 그리고 기춘원(綺春園)을 함께 통칭하여 원명원이라 부르고 있다. 1709년 강희제가 넷째아들인 윤진에게 하사한 별장이며, 윤진이 옹정제로 즉위한 후 1725년 황궁 정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장춘원 북쪽에는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은 유럽식 건물인 서양루가 있다. 원명원은 무려 150년에 걸쳐 건축되었으나 1860년 영프 연합군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이 원명원엔 연꽃이 많다. 그래서 매년 여름 연꽃이 만개해 연꽃축제도 연다고 한다.



출처


* 책 ‘중국 역사 박물관8’,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 ‘중국문화상식’

* 조선 일보 –여행 이야기- 중

* 중국국가관광국 서울지국 정보자료 중 발췌

* 네이버 지식 백과 참조

*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사이트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