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열전

원세계(위안스카이)

멋진 하루 인생 2015. 6. 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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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袁世凱: 1859~1916)는 북양군벌(北洋軍閥) 사령관으로 중화민국 대총통을 역임하였다. 자는 위정(慰庭)이고 호는 용암(容庵)이며, 하남성 항성(項城) 출신이다. 젊은 시절에 두 번이나 향시(鄕試)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결국 문(文)을 포기하고 무(武)를 택하여 이홍장(李鴻章)의 막료인 오장경(吳長慶)의 휘하로 들어갔다.

1882년(光緖 8년) 8월, 조선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당시 청나라 정부는 조선(명성황후)의 구원 요청에 응하여 오장경을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원세개는 이홍장의 천거로 한성(漢城)에 주둔하면서 조선 방어임무를 맡았다.

1894년 7월 중일갑오전쟁(즉, 청일전쟁)이 터지기 전날 밤에 원세개는 변장을 하고 한성을 탈출, 천진(天津)으로 돌아갔다.

1895년 12월 원세개는 영록(榮祿), 이홍조(李鴻藻) 등의 추천으로 천진소참(天津小站)에 주둔하고 있던 정무군(定武軍)에 파견되어, 이름을 '신건육군(新建陸軍)'으로 바꾸고 많은 심복들을 끌이들이거나 양성하여 전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후 이들은 대부분 청말 민국초의 군정 요인이 되었으니, 서세창(徐世昌), 단기서(段祺瑞), 풍국장(馮國章), 왕사진(王士珍), 조곤(曹), 장훈(張勛) 등이 바로 그들이다. 천진소참의 군사훈련은 청말 신식군대 발전의 전환점인 동시에 원세개의 야망을 다지는 기초가 되었다. 당시에 유신변법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자 원세개는 강학회(講學會)에 기부금을 내고 유신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1898년 무술변법(戊戌變法) 기간에 원세개는 유신파 앞에서는 "보수파를 제거하고 신정을 펴자"는 제안을 수락하였지만, 돌아서자 마자 즉시 그것을 밀고하였다. 21일 자희태후(慈禧太后: 서태후)는 광서제(光緖帝)를 구금하고 다시 섭정을 맡는다고 선포하였다.

1899년 6월, 원세개는 공부우시랑(工部右侍郞), 산동순무(山東巡撫) 서리로 승진하여, 신군(新軍: 당시에는 '무위군<武衛軍>'이라 하였음) 전병력을 동원하여 의화단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이로써 그는 단번에 국내외의 주목을 받는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901년 이후 직례총독(直隷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에 임명되었다. 1902년 보정(保定)에서 북양상비군(약칭 북양군)을 편성하였다. 1905년에는 그것을 북양육진(北洋六鎭)으로 편성하였는데, 제1진만 만주족 귀족 철량(鐵良)이 통솔하는 기병(旗兵)이고, 나머지 5진은 모두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주요 장성들은 거의 대부분 천진소참 시절의 심복들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북양공광기업(北洋工鑛企業) 발전, 철도 건설, 순경 창설, 지방정권 정돈, 신식학당 설립 등의 방면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신정(新政)을 처리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방대한 북양군사 정치집단을 빠른 속도로 형성해 갔다. 이들 북양집단이 세력 확장을 통하여 만주족 황제측근 집단의 세습적 지위를 강력하게 위협하자, 양측의 권력 투쟁은 날로 심화되었다.

1906년 원세개는 강요에 의해 겸임하고 있던 직무를 모두 사임하고 북양군 제1진, 제2진, 제3진, 제6진을 육군부 직할로 넘겨주었다. 그 이듬해에는 다시 북양을 떠나 북경으로 가서 군기대신(軍機大臣) 겸 외무부 상서(尙書: 장관)를 역임하였다.

1909년 초 원세개는 섭정왕(攝政王) 재풍(載)에 의해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요양하였다. 그러나 그의 많은 부하들은 여전히 요직에 있으면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원세개는 항상 재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1911년 10월(선통<宣統> 3년 8월), 무창봉기가 일어났다. 원세개는 10월 27일 흠차대신(欽差大臣)에 임명되어 호북전선의 육해군을 통솔하였다. 계속하여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어 북양군을 이끌고 한구(漢口)를 점령한 후, 즉시 북경으로 진입하여 내각을 구성하고 청정부의 군정대권을 장악하였다. 12월에 당소의(唐紹儀)를 파견하여 혁명당과 협상을 진행하였다. 손문이 이끄는 혁명당은 청조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정 체재를 약속한다면 원세개를 대총통으로 선출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원세개는 혁명당의 기세를 빌어 선통제(宣統帝) 부의(溥儀)를 퇴위시켰다.

1912년 2월, 손문(孫文)이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직을 사임한 후 참의원에서는 만장일치로 원세개를 후임자로 선출하였다. 원세개는 북경의 군사반란을 빌미로 북경에서 대총통에 취임할 것을 요구하였고, 참의원에서는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세개는 취임 초기부터 전제독재정치를 도모하였다. 그는 국민당을 집권 실행의 최대 걸림돌로 판단, 북양군경(北洋軍警)을 책동하여 정치를 간섭하고, 국민당원들을 내각에서 쫓아내고, 남방 각성의 혁명군대를 감축하고, 국민당 지도자 송교인(宋敎仁)을 암살하였다. 이와 동시에 양계초(梁啓超)를 중심으로 하는 청말 입헌파를 끌어들여 그들에게 진보당 결성 자금을 지원하고, 이로써 국민당과 대항하였다.

외교방면에서도 그는 영국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5개국 은행단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를 차관으로 확보했다. 원세개는 1913년 7월에 2차혁명을 진압하고, 북양세력을 장강유역의 각성으로 확장했다.

같은 해 10월, 원세개는 군경을 동원하여 국회를 협박, 정식으로 대총통에 선출되면서 열강들의 공식적인 승인도 얻어냈다. 이어서 국민당과 국회를 해산하고, 별도로 정치회의와 약법회의를 소집하여 독재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

1914년 5월, 민주주의정신이 깃들어있는 <임시약법(臨時約法)>과 국무원을 폐지하고 정사당(政事黨)과 육해군 대원수 통솔 판사처(陸海軍大元帥辦事處)의 설립을 선포하였다. 이 개편을 통하여 그를 지지하였던 진보당을 몰아내고 단기서 등의 군권을 박탈함으로써 군정 대권을 자신에게로 집중시켰다.

1914년 말부터 군주제 복원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1915년 5월 일본이 제안한 21개조 요구 조항 중의 대부분을 받아들이고 일본정부로부터 군주제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얼마 후 다시 북양 관료들을 교사하여 주안회(籌安會)와 청원단(請愿團)을 조직토록 하고 군주제 복원 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12월 11일 어용 참정원에서 그를 '중화제국 대황제(中華帝國大皇帝)'로 추대했다. 그 다음날 원세개는 제위를 받아들인다는 명령을 반포하고, 민국 5년(1916)을 '홍헌(洪憲) 원년'으로, 총통부를 신화궁(新華宮)으로 고쳐 1916년 원단(元旦)에 있을 황제등극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원세개의 이러한 행위는 전국적으로 각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2월 25일, 채악(蔡鍔)과 당계요(唐繼堯) 등이 운남(雲南)에서 봉기를 선포하고 원세개를 토벌하기 위한 호국전쟁을 일으켰으며, 귀주와 광서에서도 잇달아 호응하였다. 북양파 내부에도 위기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원세개는 1916년 3월 22일 군주제 취소와 '중화민국' 연호의 회복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다시 단기서를 국무경(國務卿) 겸 육군총장에 기용하고, 북양세력에 의존하여 대총통을 계속 맡고자 하였다. 그러나 봉기를 일으킨 각성에서는 그가 다시 총통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기서도 그에게 군정실권을 내놓아라고 요구하고, 광동, 절강, 섬서, 호남, 사천 등지에서도 독립이나 그와의 관계 단절을 선포함으로써 그는 결국 대중과 측근들 모두에게서 고립되었다. 5월 하순 울분에 싸인 나머지 병이 나고 말았으며, 6월 6일에는 거국적인 성토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